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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E

약속


*tmi와 추방울 많음

입덕한 지 어림잡아 1년을 향해가고 있던 그리고 퓨즈데이가 있던 6월 초, 이 팬질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자욱으로 남을는지 자주 가만히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렇게 지난 일기를 찾아 읽으며 쓰게 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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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시절 친구 따라 듣게 된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인디밴드 노래들을 곧잘 틀어주곤 했다. (DJ들은 이들과 오랜 동료 사이기도 했는데, 공중파 라디오에 발탁되자 최대한 동료들을 소개하려 했던 마음이 애틋하다. 지금은 DJ들과 출연진, 노래로 소개되었던 팀들 대부분 다 잘 됐다.) 얼굴도 모른 채 주파수를 통해 만났던 이들의 음악은 수험생활 속 쉼터이자 힘이 되었고 혼자서 정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들을 찾아 열심히 공연을 보러 다녔고, 나는 아무래도 글러다보니 감상과 리뷰도 카페나 클럽 같은 커뮤니티나 일기용 블로그에 종종 남기곤 했다.

그 중에서도 한 밴드의 보컬 언니가 자신의 솔로곡 발매 공연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고스란히 남겨두었던 것이, 요즘따라 다시 생각나서 들춰보았다.

공연이란 게 좀 아날로그적인 것 같아요. 약속, 이잖아요.
우리 한, 한 달 반 정도 전이죠? 제가 그냥 통보했어요. ‘이 날 우리 만나자-’ 그랬는데
‘그래 그러지 뭐’, 하고 이렇게 다 와주셨어요.

예전에는 그런 거 있었을 거예요. 전화기 없었을 때에는
‘우리, 50일 뒤에 시계탑 아래에서 만나-’
오, 뭔지 알죠! 그런 거 너무 멋있잖아요.
근데 그 날 잊어버리면 그냥, 별로 많이 사랑하는 게 아니구… 그죠? 두근두근 기다리고 그런 거.
오늘 저는 사실 그런 기분이었어요. 어떤 분들이 오실 지도 모르고, 확답을 받은 거 같지도 않고.
(…)

공연장 오실 때 그 마음이 어떨지 되게, 궁금해요. 저두 공연 많이 보러 다니는데
너무 막 설레고 막 미치겠는 거 있잖아요, 데이트할 때처럼.
오늘 공연도 다들 너무나 흡족한 데이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러고서 들려주었던 노래는, 그댈 향한 멜로디.



팬이 갖는 이 마음을 헤아려준 언니가 참 좋았다. 맞다. 어쩌면 이쪽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만나러 와주려나, 언제쯤이려나, 기다림 속에서 잔잔히 설레는 날들. 그러던 어느 날 ‘나 준비 됐어, 그 날 만나’ 하는 약속이 잡히면, 파도와 같이 일렁이던 마음을 해일처럼 일으켜 기꺼이 전하러 가는 길. 그날 그곳에서 당연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에 당연하게 응하러 가는 길. 반가움을 함빡 머금은 얼굴을 마주하는 날. 아끼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언제든, 언니 말마따나 데이트처럼 설렘 가득한 마음 안고 발걸음을 공연장으로 향하곤 했다. 그렇게 두근거렸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지어 와 주었는지, 무슨 생각 하며 지냈는지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고받는 시간.

한편으로 아티스트가 사라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지켜보았다. 범법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없는 사정들. 직간접적으로 접하면 접할수록 팬으로서 가슴이 아프고 말고를 떠나, 무대 위 환상 속에 사는 것만 같던 이들에게도 단지 저마다의 사연들이 있으며 그게 사람 일이라는 것 또한 차차 받아들이게 됐다. 물론 반대로 내가 먼저 떠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언제까지고 서로가 곁에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사실 하기 힘들다.
알고 있어.

다만 내 청춘과 어둠의 나날들을 지탱해주었던 이들에게 받은 은혜를 미약하게나마 보답할 길이 있다면, 막연히 바라던 소식이 닿아오는 순간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었다. 앨범, 공연, 무엇으로든 돌아오는 날 여느 때처럼 반겨 맞이하겠다는 혼자만의 맹세였다. 빛바랜 영화처럼 저 옛날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십여 년 뒤 첫눈이 내리는 날 시계탑 아래서 만나자던 그 약속 내 당연하게 지키러 씩씩하게 나서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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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버 코리아 줌 팬미팅 첫 번째 순서에서, 포브스 지면을 통해서도 인터뷰를 진행했던 케이팝 칼럼니스트 제프 벤자민의 Q&A 섹션이 진행된 것을 보았다. ‘온앤오프가 팬들에게 어떤 그룹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냐’던 마지막 질문에, 답변 순서대로

활동을 꾸준히 오래 해서 같이 함께 늙어가고 싶은 그룹이었으면 한다는 MK
노래가 중독성 있고 좋은 그룹, 퍼포먼스가 완벽한 그룹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제이어스
온앤오프의 뮤즈가 퓨즈이기에, 퓨즈도 우리에게서 영감을 얻어가길 바란다는 이션
‘온앤오프처럼, 온앤오프만큼, 온앤오프 정도는’ 라고 언급될 만큼 시간이 흐른 뒤 어떤 기준이 되었으면 한다는 효진
잠에서 깨어나 일어날 때마다 빛이 되는, ‘아침’으로 기억에 남는 그룹이었으면 한다는 와이엇까지
(유는 뭐라고 답했으려나...)
각자 개성 넘치면서도 예쁜 마음들이 일관되게 느껴지는 답변에 뭉클했다.

같이 늙어가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순수한 마음은 팬으로서 얼마나 고마운지.
노래와 퍼포먼스, 기본이자 중심인 것들을 시간이 지나도 완벽히 해내고 싶다는 말은 또 얼마나 든든한지.
생에서 서로가 영감이 되는 사이로 남길 바란다는 말은 얼마나 감동인지.
훗날 기준으로 남고 싶다는 당찬 포부는 그 자체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하루하루를 깨우는 빛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꿈결에서 미래를 목격하고 돌아온 양, 이 모든 바람들이 이루어지는 그때가 마치 당연하게 도래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켜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우직한 감정이 드는 순간은 정말이지 드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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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부푸는 마음과 별개로, 나는 영원 앞에서 소극적으로 굴고 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믿고 싶어졌다. 내민 손에 응하고 싶어졌다. 매일같이 전력을 다했던, 다하는 여섯 명을 알기 때문이겠지..

영원을 선뜻 답하지 못할 바에야, 나는 하루치 약속을 오래도록 엮어나가보려 한다. 어려서부터 두고두고 좋아해오던 시처럼. 그리고 감히, 너희에게 받는 사랑의 종류 또한 이와 흡사하다고 여겼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면 함께 성큼성큼 디뎌온 약속들로 엮어온 영원이 은하수처럼 굽이쳐 흐르고 있으리라.

작은 내가 가까스로 품을 수 있는 약속이란, 그릴 수 있는 미래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다름아닌 너희가, 이 마음가짐을 가능하게 해줬다. 나에게는 암스트롱의 도약과도 같다.
덕분이다.

오늘의 약속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 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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